아시아 '밀라노' 섬유도시 대구
대구는 섬유 제직뿐 아니라 원사, 준비, 염색, 봉제, 섬유기계, 섬유화학, 유통, 무역 등에 이르기까지 관련 산업이 총집결돼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종합 섬유산지다. 지역의 기후조건, 지리적 조건 등 섬유산업이 발전하기에 유리한 여건이기도 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축척되고 잠재돼 온 기술력 없이 그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 깊은 대구 섬유의 물줄기
대구섬유역사는 기원전 2천년경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편에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임금이 사용하는 창고에 보관하며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로써 당시 비단의 질이 상당수준에 도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 외에도 기원전 2천년경부터 동진에서 초피직물, 마직물 등이 생산됐으며 삼한시대를 거쳐 신라시대에는 마직물과 견직물의 직조기술이 어느정도 본궤도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웃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유입됐다. 문익점에 의해 10여알의 목화씨가 유입되고 그의 장인 정천익에 의해 경북 의성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목화가 재배됐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실을 뽑는 기구를 만들어 목화에서 실을 뽑았고 문래의 동생 문영은 베틀을 만들어 베를 생산했다. 물레와 무명, 각각의 명칭은 바로 문익점의 자손인 문래와 문영에서 유래한 것이다.
공장제 섬유공업의 도래
1905년 공장제 공업시대를 맞은 대구 섬유산업. 한국인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공장은 추인호씨의 동양염직소인데 추씨의 공장이 인교동에서 달성동으로 옮겨진후 달성동과 비산동 일대 공장설립은 활기를 띄게 됐고 1920년대 달성공원 부근에는 20여개 공장이 생겨나 밤낮으로 직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933년은 대구에 최초의 양말 자동직기공장이 설립된 때이다. 당시 양말 공업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곳은 평양이었는데 평양에서 양말공장주로 있던 최봉린씨가 대구로 공장을 이전, 평양 다음가는 양말공업의 형성이 시작됐 다.1920년대부터 대구의 서문시장 상인들이 평양의 영향을 받아 양말직기 2∼3대를 보유, 영세 가내수공업 형태로 양말을 제조하고 있었으나 최씨의 공장설립으로 활기를 띤 대구의 양말공업은 단기간내 경북전역과 충청, 강원, 경남 일대까지 판매영역을 확대했고 당시 대구 인근지역의 양말공장 수는 총 3백여개에 이르게 됐다. 십년 후인 1943년 대구막대소 공장이 설립되면서 대구는 국내 메리야스 공업의 중심지가 됐고 이후 대구막대소 공장 기술자들의 자영과 월남민들의 양말공장 경영이 증가하면서 역대 메리야스 공업의 기반은 착실히 다져졌다. 6·25동란이 발발하면서 주요 생산업체가 군납을 실시, 업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1952년말 내의류 생산량이 전국대비 52.8%, 양말은 무려 66.7%에 육박했는데 이후 점차적으로 감소세를 보이던 양말 생산량은 나일론 양말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됐다.
나일론과 폴리에스터로 새로운 섬유시대 개막

미군 물자에서 유입된 나일론 제품과 일부 밀수꾼들이 들여온 나일론 양말, 그리고 대구의 동산양말을 비롯한 국내 유수 양말업자들이 나일론 양말을 선보이자 염색가공업계에도 혁명이 도래함은 물론 대구 섬유업계에는 일대 파란이 일게 됐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왔던 나일론 직물로 인해 나일론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고 정부는 1차 경제개발계획 (1962∼1966)을 수립, 내수 위주 산업 전개를 수출 위주로 전환했다.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은 업계가 꾸준한 성장을 거듭, 2차 경제개발 계획(1967∼1971)에 의해 섬유산업이 수출 전략 산업으로 부각되자 폴리에스터 직물을 본격적으로 생산, 수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석유가격 인상과 원자재 가격의 상승, 세계적인 불경기의 여파로 수출국으로부터의 오더도 감소, 생산 가동률은 현격히 저하됐다. 당시 나일론, 폴리에스터 뿐 아니라 면직물, 견직물 등의 제직업체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다행히 대구 섬유업계가 이전에 구축해놓은 경제기반과 정부의 효과적인 지원 덕분에 난관은 극복될 수 있었다. 점차 호전양상을 보이던 대구 섬유업계는 1978년 들어서 폴리에스터의 대호황을 누렸다. 국내 공급만으로는 폴리에스터 필라먼트사의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긴급 수입까지해서 제직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호황이 결국은 생산 과잉으로 이어졌다. 1979년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1차 석유파동때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이 되었고 석유파동이라는 국제 경기의 침체와 맞물린 생산과잉은 업계 성장에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두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이 그간 내재됐던 대구 섬유산업의 구조적인 모순을 들춰냈고 '구조개선' 이라는 지역 업계가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나일론 수출로 급성장을 해오던 대구 섬유산업은 폴리에스터 조젯의 붐까지 일으키다 1970년대 후반 갑작스런 두차례의 석유파동에 의해 1980년대 중반까지 긴 불황의 침체에 빠지게 됐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업계의 불황
대구 섬유산업은 1980년대 후반 들어서야 서서히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 합섬직물 수출물량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수출국으로 등장했는데 당시의 수출 물량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가 52%, 일본이 48%를 차지한다. 이는 10년전 17%, 83%에서 완전히 역전된 비율이었다. 이 당시 염색공업 기술 또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1980년대 초만해도 섬유산업에서 염색공업의 기술은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으나 비산 염색공단이 조성되고 1987년 1월 염색공업 합리화 업종 지정, 1987년 열병합 발전소의 완공으로 업계는 경쟁력 강화의 기틀을 마련한 동기를 가지게 됐다. 1988년 75.5%까지 기록했던 염색업계의 가동률은 최근 들어 70%수준을 넘지 못하는 등 고전하고 있으며 올해 3월 조사한 집계에 따르면 67%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행히 최근 지역 업계는 직물 수출의 증가로 염색물량이 늘어나는 등 활기의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조화로운 발전 모색으로 난국 타개해야
지난 1일 산자부 생활산업국 국장으로 부임한 김재현 신임 국장은 부임하자마자 대구에서 간담회를 가지는 등 지역 섬유업계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 국장은 "생지 수출보다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서라도 염색가공과 디자인 등 다운 스트림 분야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제품의 고급화·차별화를 추구할 방안을 업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국장과 함께한 지역 간담회에서 지역 섬유산업을 인프라 구축과 제도개선 및 경쟁력 강화 부분을 나눠 육성, 추진할 방안이 논의되었다. 인프라 구축을 위해서 신제품개발센타, 섬유리소스센타, 섬유정보지원센타, 염색디자인 실용화센타 의 설립과 패션센타 건립 등의 추진을 논의했고 대구시에서는 체계적인 섬유기술 인력의 양성을 위해 현재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부설 섬유기술대학을 시립 섬유전문대학으로 개편· 설립할 내용을 발표했다. 제도개선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직물 비축기금의 조성과 섬유산업구조개선 특별법 제정 건의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구 섬유산지의 구조개선 사업은 통상부(현 산자부), 중소기업공단, 섬산연 등에 의해 산발적으로 추진돼 왔기 때문에 지역 섬유업계의 의견이 충분하고도 적절히 반영된 예가 드물었다. 그래서 사업의 효율성이나 공과에 관한 시비가 많았으며 지역 업계는 대안 없이 불평만 많은 업계로 지목돼 오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중앙의 유관기관, 단체 및 지역의 섬유인들이 긴밀히 협조하여 조화롭고 균형적인 발전을 통해 대구 섬유업계가 당면한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